남소현 _ 선생님을 안 지가 5년이 넘었는데 사실 개인적으로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어떻게 해서 소리를 시작하시게 됐는지도 잘 모르고 있거든요. |
윤진철 _ 아직도 그걸 몰랐어? (웃음) 내가 어렸을 때부터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해서 막연하게 꿈이 가수였어. 그런데 초등학교 때 동네에서 국악 하시던 분의 집에서 나오는 우리 가락이 너무 좋아서 홀딱 반해버렸지. 그래서 무작정 배우러 다니기 시작한 게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 거야. |
목포가 고향인 윤 동문은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웃에 살던 장복례 씨(당시 목포시립국악원 소속 무용수)의 집에서 흘러나오던 판소리며 가야금, 장구 소리가 좋아 그 집을 기웃거리다 국악원에 등록하게 됐고, 그 길로 소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소리를 배우는 게 어찌나 좋았던지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유달산에 올라 동틀 때까지 연습하고, 학교가 끝나면 가방만 던져놓고 도망치다시피 국악원으로 달려가곤 했다. 그때만 해도 국악은 당골이나 기생이나 하는 것으로 여겨 탐탁치 않아 하셨던 부모님은 학원 수업료를 일부러 내지 않을 정도였지만 일주일이 멀다하고 목이 쉴 만큼 '사생결단'의 각오로 노력하는 아들을 끝내 말리지는 못했다. 꿈속에서도 판소리를 중얼거릴 정도의 열정과 타고난 재능으로 6학년 때부터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중·고등학교 때는 이미 일반인들과 겨루어 상위 입상을 하면서 '소년 명창'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윤 동문은 "그 나이에도 '판소리는 내가 보듬고 가야 할 인생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
남소현 _ 저는 아직 특별한 고비랄 것이 없었는데요, 소리인생을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있었을 것 같아요. |
윤진철 _ 음악을 하는 모든 남자들이 그렇겠지만 변성기 때가 제일 힘들었지. 중3때부터 거의 3년 동안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니까. 내 인생의 목표이고 전부인 소리가 안 되었던 그 때의 고통은 정말 죽음보다 힘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
마음 먹은대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 때문에 울기도 많이 울었다. 주위에서 모두들 '더 이상 안 되겠다'고 소리를 그만 두라고 했지만 끝까지 소리를 놓지 않았다. 급기야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집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혼자 생활하면서 소리 연습을 할 정도였다. 그때쯤 서울에서 만난 고 김소희 선생은 은인과도 같았다. 변성기에 무리하게 소리를 내질렀던 게 원인이었던지 차분히 목을 다듬기 시작하면서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83년, 또 한번 운명과도 같은 특별한 인연을 만났다. 바로 스승인 정권진 선생을 만난 것. 정권진 선생은 보성소리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정응민의 외아들이다. 서편제에서 시작했지만 정응민이 동편제와 중고제를 받아들이면서 만들어낸 소리인 보성소리는 옛날소리의 원형을 그대로 구현하면서도 신선하고 유학적인 기품이 있는 소리로 평가된다. 윤 동문은 "실은 변성기 때 선생님을 한번 뵈었는데 소리를 그만두라고 하셨다"며 "다시 만났을 때 선생님의 심청가 완판 음반을 독학해서 그대로 불렀더니 선생님께서 '이제 목 쓰것다, 공부하자' 하시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박유전-정재근-정응민-정권진으로 이어지는 ‘박유전제 보성소리’의 계승자가 되었다. '죽어도 끝을 한번 보겠다'는 각오와 '소리가 나의 모든 것을 지배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다른 길은 생각할 틈도 없이 한길만을 달려온 셈이다. |
남소현 _ 최근에 다섯바탕 중 적벽가 완창으로 많은 사랑을 받으셨잖아요. |
윤진철 _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동편제 적벽가는 널리 알려진 반면 보성소리 적벽가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 나도 선생님 생전에 조금 배웠고 다행히 선생님께서 마지막 남기신 음반으로 독공해서 나머지를 배웠어. 남성적인데다 기교와 음의 질서가 색달라서 의외로 사랑을 받았던 것 같아. |
보성소리 중에서도 적벽가는 궁중정악의 오상고절(傲霜孤節)과 아취(雅趣)와도 비견할 만큼 품격과 예술미가 풍부하다. 하지만 삼국지가 원전인 까닭에 중국 고사가 많고 춘향가, 심청가 등 다른 판소리에 비해 소담스런 재미거리가 덜하기에 흔히 듣는 것도 부르는 것도 쉽지 않다. 영웅호걸들의 전쟁 이야기인 만큼 남성적이면서도 섬세하고 무게 있는 소리를 내야 하는데 원래 윤 동문의 목소리는 미성에 가까운 고운 소리였다. 그러던 것이 정권진 선생님을 만나 음폭을 넓히는 연습을 거치면서 적벽가를 훌륭히 소화해내는 목소리로 다듬어졌다고 한다. "판소리에는 인생사의 모든 희노애락과 우주의 섭리, 자연의 이치가 녹아 있다"는 윤 동문은 인간의 삶과 본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의 고민을 던져주는 판소리에 더욱 애착이 간다고 했다. 그래서 재주만으로 판소리의 음만 따라 하는 것은 판소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
남소현 _ 저도 판소리가 참 좋아요. 그런데 선생님, 졸업한 선배들을 봐도 그렇고…안타까운 현실이지만, 저희들의 가장 큰 고민은 취업문제거든요. |
윤진철 _ 그래, 그 문제는 나도 항상 머리가 무거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첫째는 사회인식과 정책의 변화, 둘째는 '내 상품은 내가 만든다'는 음악적 자신감을 키우는 것, 이 두 가지야. |
예술이 특정인들만 향유하는 전유물이 아니라 경쟁력 있는 고부가가치 산업이라는 사회인식과 정책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 윤 동문의 생각이다. 미래의 아이들이 초․중․고등학교 정규교과과정 속에서 전통문화를 접하며 자랄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호하고 육성해 나가야 한다는 것. 이렇게 되면 국악 전공자들이 본인의 전공을 가지고 전문교육자로서 활동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추어 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더불어 전통음악의 고장이라고 하면서도 전통예술이 대중과 함께 숨 쉴 수 있는 소극장이나 사랑방문화가 전무하다시피 한 열악한 지역 환경을 바꾸는 '문화운동' 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역설했다. 윤 동문은 "결국은 전통음악의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소명의식이 가장 중요하다"며 "300년 지난 소리를 무엇 때문에 공부하는가, 이 시대 사람들에게 소리에 대한 공감을 주기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세계시장에서 판소리를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또 하나, 사회의 일원으로서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 볼 것을 주문했다. "소리는 단순한 재능이나 재주가 아니기 때문에 철학이 밑바탕 되지 않으면 제대로 소리가 되지 않는다"며 "요즘 학생들은 정말이지 현실이나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슨 생각으로 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안타까울 때가 많다"고 말했다. 윤 동문이 80년대 5월 광주 창작판소리를 비롯해 지난해 제자들과 함께 촛불시위 무대에 올라 공연을 했던 것도 '예술인은 시대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굳은 신념 때문이었다. |
남소현 _ 저도 그때 무대에서 참 많은 것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럼 마지막 질문인데요, 후학들을 가르치시는 일 이외에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또 있으신가요? |
윤진철 _ 음, 진짜 광대로 살고 싶지(웃음). 거추장스러운 품격도 벗고 생활인으로서의 부담도 벗고, 어디든 내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찾아가고, 누구든 배우고 싶어 하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그렇게 자유롭게 살고 싶어. 예술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꿈 아닐까? |
윤 동문은 스승 정권진 선생이 늘 말씀하신 '正心正音(바른 마음에서 바른 소리가 난다)'을 늘 마음 속에 품고 산다. 효녀 심청을 부르면서 내 자신이 효를 모른다는 것은 세상을 속이고 나를 속이는 것이라는 생각, 소리 이전에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판소리의 미래를 맡길 후학들을 기르는 데 더욱 힘을 쏟고 있다고 한다. 윤 동문은 마지막으로 소리꾼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흔들림 없는 마음자세와 판소리에 대한 사랑, 뚜렷한 목적의식을 갖고 무섭게 공부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 "더 치열하게 연습하고 나 자신을 다듬어 나가야겠다"는 남소현 양의 결심을 들으며 세계인이 즐길 수 있는 음악으로 발돋음하고 있는 '세계문화유산' 판소리의 밝은 미래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