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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잔잔히 흐르는 강물에 돌을 던지면 동그랗게 물결이 번져 나가듯이 약6일의 시간은 우리들 마음속에도 조용히 감동의 물결을 그려넣어 주었다. 그 감동의 물결이 사라지기도 전에 나는 이렇게 수기를 쓰고 있다. 지난달 24일 전남대 홈페이지에 공고가 게시되었다. ‘필리핀 해외봉사단 모집! ’ 어쩌면 그냥 넘어 갈수도 있는 일 하지만 가슴 한켠에 왠지 내가 가야될것만 같은 느낌이 있었고 결국은 지원서를 제출했다. 기대하지 않았지만 꼭 가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나 컸던 탓일까 나는 운 좋게 합격할 수 있었고 그 주 주말에 바로 장성수련원에서 우리들의 어색한 첫 미팅을 가게 되었다. 처음 만난 날 정말 개성이 각자 뚜렷한 16명의 학우들이 모였다 순간 생각했다. “이 사람들과 함께라면 필리핀이 아니고 지구촌 어디라도 잘할 수 있겠다.” 그 생각은 전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거의 새벽3시가 되가면서 까지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필리핀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 줄까라는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새벽2시 3시 누구나 피곤해 할 시간임에 틀림없지만 그들의 한치도 흐트러 지지 않는 눈망울을 보면서 그들의 열정을 읽을수 있었고, 피곤한데 그만 하면 안되나 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나에게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봉사활동을 가기전부터 나는 성장하고 있었다 라는것을 스스로 느낄수 있었다. 그리고 짧은 1박2일이라는 기간에 이미 나는 필리핀에 한발자국 다가가 있었다. 수련회가 끝나고 수련회에서 정한 각종 프로그램과 할 일을 배분하였다. 하지만 시험기간이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필리핀아이들이 눈에 보여 차마 대충할수는 없었다. 다들 열심히 해주었고 나 또한 최대로 노력했다. 이렇게 각자 한명한명이 노력하는 봉사단 그들과 내가 있어 이번 봉사단이 더욱더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전체 율동과 태권무 그리고 3반 교육선생님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지독한 몸치였던 나에게 율동과 태권무는 어쩌면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여기서 그냥 내 입맛에만 맞게 하는 봉사활동이 의미가 있을까?”라고 말이다. 그렇다 오히려 자신 없는 곳에 내가 도전을 하고 그만큼 더 열심히 해서 아이들에게 먼가 보여주자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 생각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성장한 나는 없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드디어 필리핀 출발 전날 우리는 마지막 연습을 하고 인천공항에 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타는 순간 생각했다. “애들아 우리가 간다 조금만 기달려~!!!” |
인천공항에 도착한 우리들은 탑승수속을 밟고 필리핀 마닐라 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출발했다. 약 5시간의 비행 끝에 우리는 목적지인 마닐라에 도착 하였다. 난생 처음가본 필리핀의 모습 공항은 여느 우리나라 대도시와 다를바 없었지만 시내를 들어서면서 금새 그들의 생활상을 엿 볼수 있었다.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아이들 그리고 그것을 말리지도 못하고 같이 할 수밖에 없는 아이의 엄마 또 다른 한편에서는 초호화 골프장에서 골프를 즐기는 사람들... 한 하늘 아래 너무나도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방글라데시에 이어 행복지수 2위라는 필리핀 과연 그 말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내가 보는 필리핀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날 저녁 우리는 짐을 풀고 우리가 준비해온 것들을 정리하면서 내일부터 있을 교육과 시설보수에 대해 의논했다. 다들 피곤해 보이지만 아이들을 향한 애착과 열정이 있었기에 단 한사람 졸거나 딴청을 피우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필리핀에서의 첫날은 저물어만 갔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필리핀석양과 함께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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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교육 첫날 우리는 학교가 있는 마닐라 외곽의 띠앙하리 빈민촌으로 향했다. 편지를 보내고 싶어도 주소가 없어서 못보낸다는 빈민촌 정말 그곳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바다 위에 지어진 수상가옥들 하나의 여과장치 없이 모든 오물들이 그대로 바다에 흘려졌고 쓰레기 더미들이 이미 그들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정말 열악한 환경이었다. 그나마 우리가 간 빈민촌 내 초등학교 만이 가장 좋은 시설이었다. 하지만 첫날 우리가 만난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 너무나도 해맑고 욕심이 없어 보이는 아이들 너무나도 순진무구한 아이들을 보면서 한국에서 조그마한 일에도 화를 내고 난리 법석을 피웠던 나를 되돌아보니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이들에게 나의 사랑을 최대한 보여주고 가자’ 속으로 다짐 또 다짐했다. 한국에서 계획했던 대로 첫날에는 율동과 노래를 부르면서 아이들과 친해졌다. 올챙이송과 여러 노래들을 틀며 아이들과 함께 노래하며 율동을 했다. 한국아이들이었다면 시시하다면서 말을 잘 안 들을수도 있었겠지만 교육의 기회조차 사치였던 그곳 아이들에게는 매우 즐거웠나 보다 우리보다 더 열심히 따라해줬다. 너무나 고마웠고 신나는 교육일정이었다. 아이들과의 의사소통이 문제일꺼라고 생각했던 한국에서와는 달리 아이들과는 말도 필요없었다. 마음이라는 소통수단이 그들에게는 말보다 더 따뜻하고 간절했나 보다. 눈빛만 봐도 알수 있다는 말을 그제서야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미술시간과 태권도 활동 미술시간에는 모자이크를 준비했다. 대한민국과 필리핀은 하나라는 걸 보여주고 싶던 나는 각 나라의 국기를 그리고 색종이 색깔에 맞춰 모자이크를 했다. 지나칠 정도로 집중하고 열심히 해주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머라도 좀더 해주고 싶고 더 열정적인 나로 만들었다. 너무나도 순진하고 열심인 아이들 그 아이들을 보면서 필리핀의 희망을 보았다. 태권도활동에서는 태권도 3단 유단자인 태종이와 나라가 유감없는 실력을 발휘하면서 아이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우리나라 국기인 태권도 그들도 같이 따라하고 미트로 발차기를 하면서 재미난 시간들을 보냈다. 이미 우리는 그들과 하나가 되 있었고 가족이 되어있었다. 우리가 이렇게 교육활동을 하고 있을 때 시설 보수 팀은 옆에서 아이들이 놀수 있는 놀이터보수 공사와 빈민촌 소독방역작업을 하고 있었다. 뛰어놀 공간조차 없어서 더러운 오물가에서 헤엄치는 아이들을 보면서 너무나도 안타깝기 그지없던 나였다. 이렇게 그들에게 하나하나 도움이 되가는 나와 우리 봉사단을 보면서 정말 오기 잘했다 만약 안왔더라면 정말 후회할뻔 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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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 교육을 성공적으로 마친 우리들은 다시 버스를 타고 마닐라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는길 역시나 빈민촌들이었다. 강가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빈민촌들 그야말로 희망이 없는 그곳이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사람들이 얼굴을 찡그리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관심을 보였다. 그들과 나의 한국생활이 오버랩이 되며 나는 느꼈다. 저것이 정말 행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말이다. 진정한 행복은 물질적인것이 아니고 정신적이라는것을 왜 몰랐을까라는 반성이 들었다. 마치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생각났다. 결국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것인데 왜 나는 지금까지 눈에 보이는것에만 집착했을까라는 반성 그것이 나를 다시 반성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4일동안 숙소와 학교를 오가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숙소에 와서 일일반성회를 가졌다. 각자만의 느낀점들과 여러 가지 생각들 한명한명의 느낌은 책으로 발간해도 될만큼 정말 주옥같은 생각들이었다. 난 참 봉사단사람들이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함께 한 부처장님도 너무 즐거웠다. 이렇게 우리는 그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주고 그들에게서 마음의 여유와 진정한 행복을 선물하고 있었다. 셋째날 아침이 밝았다. 두 번째 교육은 도화지와 크레파스를 나눠주고 선생님얼굴을 그리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한번쯤은 해봤을 것들이었지만 그들에겐 하나하나 정말 생소하고 신기한 것이었다. 나의 얼굴이 모델이 되다니 정말 색다르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나의 주근깨를 보고서는 얼굴에 점을 찍는걸 보고 봉사단전체가 폭소마당이 되었다. 역시 아이들의 눈은 못속이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 이렇게 그림그리기를 하고 간식시간을 가졌다. 과자와 과일주스의 브레이크 타임 그때서야 비로소 나는 조그마한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밖을 내다봤을때 아이들이 우리의 수업에 들어가고 싶어서 집에 가지도 않고 우리를 보며 수업시간부터 계속 따라하고 있는 것을 볼수 있었다. 교육의 기회가 힘든아이들 배울 권리조차 잃어버린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안되기에 약간은 인원수를 제한 했는데 저들도 같이 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짧은 간식과 점심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의료봉사를 했다. 의료봉사라고 해봐야 혈압재주고 뜸을 놔주고 부황뜨는게 전부였지만 그곳 현지 주민들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고마워했다. 이것밖에 해줄수 없음에 나는 안타까웠지만 그들의 고마운 표정을 보면서 더욱더 열심히 노력하였다. 너무나도 열악한 환경이다 보니 피부병과 안과질환이 매우 많았다. 전문지식이 없었기에 도와줄수 없는내가 너무 안타까웠다. 정말 그들에게는 필요한것이 많은데 내가 해줄 수 있는게 너무 작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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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ease, Remember us, I will not forget you and I miss you.’ 어쩌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금방 그들을 잊어버릴지 모른다. 암울한 취업난 그리고 너무나도 경쟁적인 사회 분위기속에서 그들에 대한 기억이 금방 희미해져 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평생에 잊지 않을 존재라는 것을 알고 다시 대답했다. ‘Of course, I will not forget you too. ’ 라고 말이다. 그리고 내가 입고 왔던 단체 전남대 티와 볼펜 손수건등 내가 줄수 있는것은 모두 주었다. 분명 내가 아이들에게 배운게 많았기 때문에.... 나는 그렇게 그들과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고 봉사단을 떠나서 지구촌 같은 이웃이 되어가고 있었다. 필리핀에서의 5일은 한국에서 보냈던 스물 세해를 무색하게 할 만큼 나를 성장시켰고 내게 커다란 행복과 소중한 인연, 빛나는 추억을 선물했다. 나는 이것이 내인생에 있어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기억임에 확신한다. 아울러 앞으로의 내 삶의 진행과 발전에 있어서 커다란 힘이 될 것임을 또한 의심하지 않는다. 또한 서로다른 17가지 빛깔의 매력으로 똘똘 뭉친 전남대봉사단 2기 사람들과 필리핀 천국의 아이들, 그리고 우리의 수장 부처장님과 단장 부단장 역할을 해주신 믿음누나 차빈형에게 다시 한번 고맙고 사랑한다는 애기를 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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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나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내가 만약 필리핀 빈민가에서 태어났으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생각을 할까’라는 질문을 해보았다. 결론은 ‘만족하면서 살지 않았을까?’라는 결론을 내렸다. 내가 만약 피자의 맛을 몰랐다면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과 음악회를 몰랐다면 주어진 상황에서 만족하며 땀 흘리고 쌀알에 감사하는 삶을 살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을 하며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필리핀 아이들의 미소와 행복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꿈만 같았던 필리핀에서의 5일 나는 정말 돈으로도 살수 없는 수많은 것들을 얻었다. 진정한 행복의 의미 아이들의 천진난만함 잊지 못할 추억 그리고 정말 배울 것이 많은 개성 다른 16인 내 인생에 있어서 그들은 하나의 재산으로 자리매김함에 나는 감사한다. 필리핀에서의 5일밤은 그 어떤 특급 호텔의 스위트 룸보다 나의 밤을 더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고 수많은 추억을 선물했다. 이렇게 뭉친 우리 그리고 필리핀 아이들 이 소중한 추억은 평생간직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있게 해준 전남대학교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앞으로 이어질 3기, 4기는 더욱더 발전되는 봉사활동이 되었으면 한다. 앞으로 이 봉사활동을 하게 될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우리가 봉사하는 것이지만 결국 우리가 더 많이 배운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이 봉사단이 전남대 역사속에 기억되는 봉사활동으로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 첫 부분을 시작한 우리가 너무 자랑스럽고 행복하다. 여러분 모두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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