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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쥐팥쥐, 소공자, 이야기 한국사, 메이플 스토리, 마법천자문…, 교수 연구실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아이들 책에 둘러싸여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는 이 사람. 중국 청도호텔경영대학 한국어학과에서 학습자료로 쓸 ‘헌 책 보내기 운동’을 벌여 보름 만에 2,000여 권의 책을 모은 심리학과 이종목 교수다. 11월 말까지 계속하려던 기증운동을 일찌감치 마무리하고 배편으로 부칠 책 포장을 어찌 할까, 즐거운 고민에 빠져 있는 이 교수를 만났다. |
20여 년 이어진 중국과의 인연
발 딛고 지나갈 길목만 남긴 채 온 방안을 뒤덮은 책들 속에서 “별로 이야기할 게 없는데…”라는 웃음섞인 말로 이종목 교수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한국 대학의 심리학과 교수와 중국 대학의 한국어학과, 언뜻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이 어떤 인연으로 시작된 것인지 가장 궁금했다. “내 전공인 심리학이란 학문이 서양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보니 이론과 실제에 상당한 괴리가 있습니다. 적용에도 한계가 있고요. 그래서 한국인의 심리나 행동방식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동양의 정신적 전통에 눈길이 갔습니다. 동양심리학과 유학에 관심이 쏠리면서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기도 전인 89년부터 중국을 드나들게 됐어요.” |
급기야 본격적인 동양학 공부에 뛰어들었고, 부족한 시간을 쪼개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 교수는“결국 서양학문인 심리학이 나를 동양학·중국팬으로 만든 셈”이라며 웃었다. 이후 95년 요녕대학, 99년 상해 복단대학에서 한국어학과 교환교수로 근무하며 중국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2005년 청도호텔경영대학으로 파견 근무를 가게 되었는데 대학측이 한국어학과를 만드는 데 자문을 구해왔다고 한다. “청도(칭다오)는 만 개가 넘는 한국기업들이 진출해 있는 산둥반도의 핵심도시예요. 한류열풍에 이어 근로조건이 좋은 한국 기업에 취업하려는 학생들이 늘면서 한국어 실력이 큰 경쟁력이 되고 있습니다. 마침 대학에서 한국어학과를 만드는 게 어떻겠냐고 의논해 와서 적극적으로 도운 것이 이번 책 모으기의 계기라면 계기랄 수 있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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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한마음으로 모아준 2천권의 책 한국어학과 신설은 성공적이어서 40명 정원인 첫 입학생 모집에 1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지원을 했다. 총정원제를 적용하는 중국대학 정책에 따라 한국어학과에 100명이 고스란히 입학하고 일본어학과가 폐과되는 이변 아닌 이변을 낳았다. 3년이 지난 지금은 3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재학 중인데 재정 여건 등 학과 운영이 난관에 부딪친 모양이었다. “올해 초 한국어학과 교수님한테서 메일이 왔어요. 교과서 외에 마땅한 학습 자료가 없어서 많이 애를 먹고 있다고 말이죠. 특히 한국 역사나 전통, 음식 같은 민속 문화에 관련된 것이나 동사활용 같은 전문 어학책자들을 구해줄 수 없는지 목록까지 함께 보냈더군요. 한국을 배우고 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인데 어떻게든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봄에 부친상을 치른 이 교수는 가족회를 거쳐 선뜻 조의금 일부로 두 차례에 걸쳐 1,000여 권의 책을 구입해 보내 주었다. 대학은 이에 보답하기 위해 학부자료실에 한국어자료코너를 별도로 만들었는데 아직도 턱없이 자료가 부족한 상황이어서 이번에 학내와 지인들을 대상으로 ‘헌 책 보내기 운동’에 나선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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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효식 교수, 최협 교수 등 동료 교수들과 도서관 직원들이 힘을 보태 주었고 김순임 교수는 PC까지 함께 기증했다. 또 평소 친분이 있던 불로초등학교 이혜숙 교장이 흔쾌히 전교생을 대상으로 헌 책 모으기에 나서 며칠 사이에 2,000권을 훌쩍 넘기게 됐다. “이 책들 상당수가 불로초등학교 아이들이 보내준 것입니다. 만화, 위인전기, 창작동화부터 세계대백과사전까지, 참 다양한 책들이 모였어요. 이 교장의 부탁대로 이 책들이 꽂힌 도서관 사진과 청도경영대학 명의의 감사장을 꼭 전달할 예정입니다. 머나먼 중국 대학생들과의 교류가 아이들에게도 뿌듯한 경험이 될 것 같아 흐뭇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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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누기’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어쩌다 보니 점점 일이 커져 버렸다”며 웃는 이 교수지만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리고 퇴임 후에도 두 아들에게 그 뜻을 이어 책 보내기를 계속할 생각이라고 한다. 이 교수는 이야기 도중에 자리에서 일어나 곱게 접힌 화선지 한 장을 펼쳐 보여 주었다. 힘차고 유려한 필체로 쓰인 글은 ‘연박서원(淵博書苑 : 깊고 넓은 책마당)’. 서예가 학정 이돈흥 선생에게 직접 부탁해서 받았다는 이 글은 이번 겨울방학에 청도를 방문해 도서관 현판으로 걸 계획이다. ‘연박’은 깊고 넓다는 뜻의 중국어 표현인데, 두 아들의 돌림자가 ‘연(淵)’인데다 각각 고려대와 동경대에서 ‘박(博)’사 학위를 받은 것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듯해서 이 일이 아들들과도 큰 인연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
“사실 아들이 아니더라도 누구든 계속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한국의 영향력이 커진다는 의미잖아요. 책꽂이에서 잠자고 있는 책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알고 싶어 하는 중국인들에게 좋은 교재가 된다는 게 얼마나 즐겁고 보람 있는 일입니까?” 한-중 관계를 고양시킨다거나 중국 일부의 반한감정을 없애겠다는 거창한 의미 대신 “그저 중국과 한국을 맑게 비춰주는 거울 같은 역할을 했으면” 하는 소박한 희망을 갖고 있다는 이 교수. 한국어를 매개체로 한 ‘국제적 마음 나누기’가 앞으로 또 어떤 좋은 인연의 고리를 맺게 될지 애정과 관심으로 지켜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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